조용준, 드디어 연봉계약 "조라이더 부활 보여주겠다"

[마이데일리 = 이석무 기자] '조라이더' 조용준이 그동안 미뤄왔던 연봉 계약을 드디어 마쳤다.

히어로즈는 28일 오전 2008년 연봉 계약 대상자 중 미계약 선수로 남아있던 투수 조용준과 연봉 8000만원에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지난 시즌이 끝난 뒤 구단과 연봉 재계약을 맺지 않고 보류선수 명단에 올랐던 조용준은 그동안 2005년 9월 미국 앨라배마 스포츠클리닉에서 오른 어깨 수술 후 재활에 힘써 왔다.

조용준은 "올해 5월부터 8월까지 4개월간 미국 미시시피 잭슨에 위치한 그린빌에서 재활에 집중했다. 이후 한국에서 계속 몸을 만들어 왔기 때문에 현재 컨디션은 좋은 편이다"라며 "마무리훈련과 전지훈련 기간 동안 뼈를 깎는 노력으로 '조라이더'의 부활을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조용준은 2002년 현대 유니콘스에 입단해 첫 해 9승 5패 4홀드 28세이브를 기록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신인왕도 그의 몫이었다. 이후 2003년 26세이브, 2004년 34세이브, 2005년 27세이브를 거두며 리그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이후 어깨 부상을 당해 2005년 9월 미국에서 어깨 수술을 받은 뒤 제 구위를 전혀 찾지 못하고 2년 동안 1경기도 출전하지 못해 아쉬움을 낳았다. 이날 계약을 체결한 조용준은 29일 제주도 마무리 훈련에 합류한다.

[히어로즈 조용준. 사진=마이데일리 DB]

(이석무 기자)

정말 조용준이 잘만 해준다면!!!
아, 09시즌이 기대되네~SK-두산 어여 빨리 쫑해랑!!!누가 이기든간에~ㅎㅎ솔직히 두산 화이팅!

by 하늘지기 | 2008/10/28 17:40 | 트랙백 | 덧글(0)

신자의 고난

"왜 저입니까?"

"왜 저에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십니까? 정말, 하나님...살아계시다면 이러시면 안 됩니다..."

"주님...정말 힘듭니다..."

신자들의 입에서, 언젠가는 터져 나오고야 마는 고백...

정말 입을 굳세게 다물고, 이를 악물고 내뱉지 않으려 애쓰지만...

결국 다문 이 사이를 비집고 나오고야 마는 탄식...

"주님, 왜 제가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하나요?"

왜...왜....왜?!

이해할 수 없는...아니 이해하기 싫은 나날들이 오고...삶의 절망 가운데로 젖어 들어갈 때...주님께서 주시는 생각...

"왜 제가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란 질문보다 앞서 더 이해가 안되는 질문...

"왜 주님께서 그런 고난을 받으셔야 하셨습니까?"



요한복음에서 십자가영광으로 표현된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 (요12:1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요12:23)


창조자...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본체...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

그분이 왜 고난을 당하셔야 했는가...십자가는 단순히 죽음만이 아니라 멸시, 천대, 조롱, 핍박, 저주를 다 품고 있다.

왜?

주님께 고요히 묻는다.

"주님 왜 주님께서 그런 고난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부드러운 주님의 음성

"너를 위함이야...."

너를 위함이야.....

너를 위함이야........

"너를 위함이야...그런데 나에게 십자가는 고난이 아니라 영광이란다. 너를 위해, 너를 살리기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이, 나에겐 영광이야...."

주님께선 그 십자가에서 침뱉음 당하고 뺨 맞고 수치를 당하고 피와 물과 모든 것을 쏟으신 것이 영광이란다...나를 살리는 일이기에 영광이란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나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이 영광이었으면 좋겠어..."

아, 신자의 영광...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갈6:17)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1:24)

신자의 영광이란, 세상 나라에 속한 것이 아님을...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요21:19)

http://www.donghaeng.net/duty/duty.swf

by 하늘지기 | 2008/10/28 17:24 | 기독교이야기 | 트랙백 | 덧글(1)

현실 속에 그리스도인


[저차원적이며 오로지 지상의 것에만 몰두한 세속인은 의심할 나위 없이 총명이 어두워지고 사단이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는 포로가 된 것이다. 항상 지상적인 것에만 매어 달린 벌레나 두더지들이 무엇을 보겠는가? 속세의 먼지가 눈에 끼어 있는 한,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은 경건 대신에 불경건, 은혜 대신에 죄, 하나님 대신에 세상, 그리스도의 법 대신에 그들 자신의 의지를 추구할 것이며, 그런 나머지 결국은 천국 대신에 지옥에 들어갈 것이다.

 

 천국에 마음을 부지런히 고정시킨다면, 당신은 부여받은 은혜의 힘을 줄곧 유지하고 책임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천국에 마음을 고정시킨 신자는 살아 있는 신자이다. 우리를 어리석게 만드는 것은 천국을 향한 우리들의 순례이다. 천국에 중심과 무게를 둔 신자를 바라보라. 그러면 당신은 그가 다른 신자들과 다른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가 이행하는 책임과 대화에서는 그가 항상 추구해 온 천상의 것들이 반영될 것이다.

 

 천국은 당신의 모든 소망이요 지상의 그 어떤 것도 당신에게 안식을 줄 수 없다는 것, 천국을 바라지 않는 마음은 결코 위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은 당신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당신은 위를 걷고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땅에 속하여 있지는 않은 가? 천국 생활의 달콤함을 요구하고는 있는가?

 

 자신의 몸을 침상에 내 뻗치고서 “아, 이 편안함이여!”라고 말하는 게으름뱅이처럼, 당신은 말하고 시시콜콜한 데 신경을 쓰거나 편안한 대로 살면서 “오, 나의 마음을 천국에 두었으면!”하고 말한다.

 

 그러므로 천국 생활 혹은 육신적 생활 양자 중에 선택을 하되 지혜 있는 선택을 하라

-리처드 백스터『성도의 영원한 안식』


[대학은 학문을 추구하는 사회입니다. 학생여러분은 학문을 닦아, 중세의 표현을 빌리자면 식자clerk, 즉 철학자, 과학자, 학자, 평론가, 역사가가 될 사람들입니다.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학문을 하는 것은 일견 이상해 보입니다. 마무리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임무를 시작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아니, 설혹 우리가 죽음이나 군복무로 공부를 중단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해도, 친구들의 목숨과 유럽의 자유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이런 한가로운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불타는 로마를 보며 바이올린을 켜는 꼴 아닙니까?

 우리가 이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으려면 우선 이 질문들을 내려놓고 평화 시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진작 생각해 보았어야 하는 다른 질문들을 먼저 챙겨야 할 듯합니다. 방금 저는 로마가 불타고 있는데 바이올린을 켜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도시가 불타는데 바이올린을 켠 것이 아니라 지옥의 문턱에서 바이올린을 켰다는 점을 네로의 진정한 비극으로 여겨야 합니다. 

 대학에 오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전쟁이 제기한 질문들보다 훨씬 중요한 한 가지 질문을 도저히 외면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질문은 이것입니다.“우리는 매순간 천국이나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피조물이다. 이런 우리가 세상에서 허락된 짧은 시간의 한 조각이라도 문학이나, 예술, 수학이나 생물학 같은 상대적으로 사소한 일들에 사용하는 것이 올바른 일일까? 아니, 그런 일이 심리적으로 어떻게 가능할까?”  

 현재의 재난을 올바른 시각에서 바라보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전쟁이 완전히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내지는 않았습니다. 원래부터 있던 상황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될 따름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벼랑 끝에서 살아왔습니다. 인류 문화는 언제나 그 자신보다 무한히 중요한 것의 그늘에서 존재해야 했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었을 때까지 미뤘다가 지식이나 미를 추구하고자 했더라면 그 추구는 아예 시작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정상적이었던 때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인류는 당장 지식과 미를 원했고 결코 오지 않을 적당한 순간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사람들은 포위된 도시에서도 수학 공리를 내놓고,사형수 감방에서 형이상학적 논증을 펴고, 교수대를 놓고 농담하고, 퀘벡 성채로 진군하면서 새로 지은 시를 토론하고, 테르모필레에서도 머리를 빗었습니다. 이것은 허세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본성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자문해야 합니다.
“어떻게 영혼 구원 외의 다른 일을 생각할 만큼 경박하고 이기적일 수가 있는가?”그리고 바로 지금은 우리의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하나 더 있습니다. “어떻게 전쟁 욍의 다른 것을 생각할 만큼 경박하고 이기적일 수가 있는가?”

 첫 번째 질문은 우리의 삶이 철저하고 분명하게 종교적이 될 수 있고 그래야 마땅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우리의 삶 전체가 철저하게 국가를 위한 것이 될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저는 두 가지 질문 모두에 대해 같은 대답을 할 것입니다. “그런 일이 마땅한 일이건 아니건, 영혼 구원이나 전쟁만 생각하고 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저는 회심한 후에도 제가 회심 이전에 하던 일과 대부분 같은 일을 하며 살 거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정신으로 행하기를 바라지만, 어쨌건 일 자체는 같습니다.

 제가 지난 번 전쟁에 참전하기 전에는 참호에서의 삶이, 어떤 식일지는 몰라도 어쨌든 온통 전쟁뿐일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전선戰線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연합군의 대의명분이나 전투의 진행 상황에 대해 말하거나 생각하는 일이 오히려 줄어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료들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게다가 톨스토이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쟁 소설에서 동일한 사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일리아드Iliad》도 나름의 방식으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회심도 군 복무도 인간적 생활을 말살해 버리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도 군인도 여전히 사람입니다.

 우리 대부분의 경우, 회심을 하건 참전을 하건 그 이전까지 살아왔던 생활이 중단되거나 없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여기서 몇 가지 구별을 해야겠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참전 명분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명분으로서 아주 의로우므로 참전하는 것이 의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모든 의무는 종교적 의무이기도 하므로 그것을 수행해야 할 절대적인 책임이 따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의무가 있습니다. 위험한 해변 근처에 사는 경우라면 누군가 물에 빠졌을 경우 언제라도 구조할 수 있도록 인명 구조법을 배울 의무까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를 구하기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것이 우리의 의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관심을 그 일에만 기울이면서 인명 구조에 몰두한다면, 그래서 다른 일은 전혀 생각하지도, 화제에 올리지도 않고 모든 사람이 수영을 배울 때까지 일체의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편집광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일은 목숨을 버릴 만한 가치가 있지만 인생의 목표로 삼을 만큼 가치 있는 일은 아닌 것입니다.

 종교 역시 다른 모든 자연적 활동을 배제하면서 우리의 삶 전체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위의 경우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의 권리 주장은 무한하고 가차 없습니다.…중간의 길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기독교가 사람들의 일상적인 활동을 어느 것도 배제하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에게 하던 일을 계속 하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디너파티에 가도 된다고 합니다. 심지어 이교도들이 베푸는 디너파티의 참석도 허락합니다. 우리 주님은 결혼식에 참석하시고 기적의 포도주를 제공하셨습니다. 기독교가 가장 활발한 시기에 교회의 후원으로 학문과 예술이 번성했습니다. 물론, 여러분은 이 역설의 해결책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의 모든 자연적인 활동들, 심지어 가장 비천한 활동들이라도 하나님께 바치면 그분이 받아 주십니다. 하지만 제아무리 고상해 보이는 일이라 해도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으면 악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무소부재無所不在와 비슷합니다.

 과연 하나님이 청소부와 구두닦이보다 학자와 시인들을 본질적으로 더 기뻐하실까요? 영어의 ‘영적spiritual’이라는 뜻의 단어를 독일어의 ‘정신적geistlich’이라는 뜻으로 처음 사용해서 더없이 위함하고 반反기독교적인 오류를 끌어들인 사람은 매튜 아널드Mathew Arnold였던 것 같습니다. 이제 이 오류를 머리에서 완전히 지워 버립시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학문을 한다는 말이, 교훈적인 결론 도출을 지적 탐구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베이컨의 말처럼, 그것은 진리의 창조자께 거짓의 불결한 제물을 바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제 말은 지식과 미를 그 자체로 추구하되, 그 욕구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충동과 능력이 존재함을 근거로 그것들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적합한 자리를 차지할 것임을 추론하는 목적론적 논증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에겐 학자의 삶이 의무로 주어져야 할 것입니다. 현재로선 그것이 여러분의 의무인 듯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고상한 문제들이 여러분이 지금 공부하는 앵글로색슨어 음운 법칙, 화학 공식 같은 교과 내용과 우스울 정도로 상관이 없어 보일 수 있다는 점은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모든 소명에는 이와 비슷한 충격이 기다리고 있습니다.젊은 성직자는 성가대 간식을 준비하게 되고, 젊은 소위는 잼 단지들의 관리를 책임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허영심이 강하고 실속 없는 사람들이 걸러지고 겸손하고 강인한 사람들이 남게 되는 겁니다. 그런 종류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동정이 전혀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천국을 세우고 있다고 생각했다면, 현재의 세상을 순례의 장소가 아닌 인간의 영혼을 만족시켜 주는 영원한 도성으로 바꿀 비결을 추구했다면, 이제 우리는 미몽에서 깨어났습니다.]

-C.S. 루이스「전시의 학문Learning in War-Time」『영광의 무게』


난 루이스 쪽에 맘이 가네...우린 천사가 아니라 인간이란 점을 기억해야 정죄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by 하늘지기 | 2008/10/28 15:38 | 기독교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포이어바흐, 계시에 관해서.

"계시에 대한 신앙은 종교적 의식에 특징적인 환상을 가장 분명하게 폭로한다. 이 신앙의 전제는, 인간 스스로는 신에 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으며 인간의 지(知)는 모두 단지 공허하고 지상적이고 인간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은 초인간적인 존재자이다. 즉 신은 오로지 신 자신에 의해서만 알려진다. 따라서 우리는 신이 우리에게 계시한 것 이외에는 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 단지 신에 의해 전달된 내용만이 신적 내용이며 초인간적 내용이며 초자연적 내용이다. 따라서 우리는 계시를 매개로 해서 신을 신 자신에 의해 인식한다. 왜냐하면 계신는 신의 말이며, 자기자신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한 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계시에 대한 신앙에서 자기를 부인한다. 즉 자기 밖으로 나가고 또 자기를 뛰어 넘는다. 인간은 계시를 인간의 지(知)와 견해에 대립시켜 나킨다. 계시 안에는 숨겨진 지가 드러나고 모든 초감성적인 신비들이 드러난다.

여기서는 이성은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계시는 인간의 본성에 의해 규정된다. 신은 동물이나 천사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은 인간적 표상을 가지고 인간적 언어로 말하는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자기를 외적으로 전달하기 전에 인간이 신의 대상인 것이다. 신은 인간을 생각한다. 신은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욕구에 따라 자기를 규정한다.

 

 신은 확실히 의지에서는 자유롭다. 신은 자기를 계시할 수도 있고 계시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신은 오성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신은 자신이 바라면 어떤 것이라도 인간에게 계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은 언젠가 계시하고 싶으면 인간에게 적합한 것,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본성에 적합한 것을 계시한다.

 

 신의 계시가 어떤 다른 존재자에 대한 계시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계시라면, 신이 계시하는 것은 신이 계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이 인간을 위해 생각하는 것ㅡ그것을 신은 인간의 관점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서 생각하며,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다.

 

 신은 자신을 인간의 지위에 두며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러나 그 사고 방식은, 신과는 다른 이 존재자(인간)가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고 또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때의 사고방식과 동일하다.

 

 신은 신의 사유능력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유능력을 가지고 생각한다. 신이 계시를 계획할 경우에는 신 자신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해력에 의존한다. 신으로부터 인간으로 오는 것은 단지 신 안에 있는 인간으로부터 인간으로 온 것에 지니자 않는다.

 

 즉 그것은 단지 인간의 본질로부터 현실적인 인간으로 오며, 유로부터 개체로 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신의 계시와 이른바 인간적 개성 또는 인간성 사이에는 환상적인 구별 이외의 어떤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신의 계시의 내용 또한 인간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의 계시의 내용은 신으로서의 신으로부터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 이상이나 인간적 욕구에 의해 규정된 신으로부터 발생했기 때문이다. 즉 직접적으로 인간적 이성이나 인간적 욕구로부터 발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시의 경우에도 인간은 오로지 자기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며, 더구나 그것은 길을 돌아서 다시 자기자신으로 복귀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신학의 비밀은 인간학"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다!라는 것이 가장 확증된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김쾌상 역『기독교의 본질』 까치.




"양육에 대한 생각은 가정적 의식에 특징적인 환상을 가장 분명하게 폭로한다. 이 생각의 전제는, 아기 스스로는 어머니에 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으며 우아의 지(知)는 모두 단지 공허하고 지상적이고 인간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은 (아기에게는) 초인간적인 존재자이다. 즉 어머니는 오로지 어머니 자신에 의해서만 알려진다. 따라서 아기는 어머니가 아기에게 양육하며 알려준 것 이외에는 어머니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 단지 어머니에 의해 전달된 내용만이 어머니에관한 내용이며 (아기에게는)초인간적 내용이며 (아기에게는)초자연적 내용이다. 따라서 아기는 양육를 매개로 해서 어머니을 어머니 자신에 의해 인식한다. 왜냐하면 양육하며 해준 말은 어머니의 말이며, (아기)자기자신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한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기는 양육에 대한 생각에서 자기를 부인한다. 즉 자기 밖으로 나가고 또 자기를 뛰어 넘는다. 아기는 양육을 아기의 지(知)와 견해에 대립시켜 나간다. 양육 안에는 숨겨진 지가 드러나고 모든 초감성적인 신비들이 드러난다.

 

여기서는 (아기의)이성은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양육는 아기의 본성에 의해 규정된다. 어머니는 동물이나 천사를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아기에게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머니는 유아적 표상을 가지고 유아적 언어로 말하는 것이다.(예: 지지, 맘마 등)

 

어머니가 아기에게 자기를 외적으로 전달하기 전에 아기가 어머니의 대상인 것이다. 어머니는 아기를 생각한다. 어머니는 아기의 본성과 아기의 욕구에 따라 자기를 규정한다.

 

 

어머니는 확실히 의지에서는 자유롭다. 어머니는 자기를 아기에게 알려줄 수도 있고 알려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머니는 오성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어머니는 자신이 바라면 어떤 것이라도 아기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 언젠가 알려주고 싶으면 아기에게 적합한 것, 있는 그대로의 아기의 본성에 적합한 것을 알려준다.

 

 

어머니의 양육이 어떤 다른 존재자에 대한 양육이 아니라 아기에 대한 양육이라면, 어머니가 양육하는 것은 어머니가 양육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어머니가 아기을 위해 생각하는 것ㅡ그것을 어머니는 아기의 관점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서 생각하며, 그것은 아기의 본성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을 아기의 지위에 두며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러나 그 사고 방식은, 어머니와는 다른 이 존재자(아기)가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고 또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때의 사고방식과 동일하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사유능력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기의 사유능력을 가지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양육을 계획할 경우에는 어머니 자신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아기의 이해력에 의존한다. 어머니로부터 아기으로 오는 것은 단지 어머니 안에 있는 아기로부터 아기로 온 것에 지니자 않는다.

 

 

즉 그것은 단지 아기의 본질로부터 현실적인 아기로 오며, 유로부터 개체로 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어머니의 양육와 이른바 유아적 개성 또는 아기의 속성 사이에는 환상적인 구별 이외의 어떤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어머니의 계시의 내용 또한 유아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양육의 내용은 어머니로서의 어머니으로부터 발생한 것이 아니라 유아적 이상이나 유아적 욕구에 의해 규정된 어머니으로부터 발생했기 때문이다. 즉 직접적으로 유아적 이성이나 아기 욕구로부터 발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육의 경우에도 아기는 오로지 자기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며, 더구나 그것은 길을 돌아서 다시 자기자신으로 복귀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어머니의 비밀은 아기"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다!라는 것이 가장 확증된다."

 

설마...치환한게 어색하다고 텍스트를 이해 못하는 사람은 없겠지?
(어색하긴 내가 봐도 어색하다고!)

포이어바흐의 말이 가능하다면, 어머니 역시 환상적 존재이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아이를 기를 때 아이의 이해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아이가 필요한 것을 아이의 언어로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 그렇다고 어머니가 자신의 사고능력이 아닌 아기의 사고능력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논리적 근거가 없는 레토릭이다!
 "신은 신의 사유능력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유능력을 가지고 생각한다.
"

근거는??

by 하늘지기 | 2008/10/27 17:01 | 기독교이야기 | 트랙백 | 덧글(2)

내일의 향해 쏴라

폴 뉴먼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영화를 하나씩 다시 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스타트가 내일을 향해 쏴라였다.

이 영화를 봤다는 사실만으로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잠깐, 밖에 러포즈 있었어?"

"러포즈? 아니."

"다행이네. 한순간 우린 죽었구나 했어"


아!!! 이렇게 유쾌할 수 있다면.

-폴 뉴먼은 정말 잘 생겼다...

by 하늘지기 | 2008/10/24 01:57 | 세상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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