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속에 그리스도인


[저차원적이며 오로지 지상의 것에만 몰두한 세속인은 의심할 나위 없이 총명이 어두워지고 사단이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는 포로가 된 것이다. 항상 지상적인 것에만 매어 달린 벌레나 두더지들이 무엇을 보겠는가? 속세의 먼지가 눈에 끼어 있는 한,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은 경건 대신에 불경건, 은혜 대신에 죄, 하나님 대신에 세상, 그리스도의 법 대신에 그들 자신의 의지를 추구할 것이며, 그런 나머지 결국은 천국 대신에 지옥에 들어갈 것이다.

 

 천국에 마음을 부지런히 고정시킨다면, 당신은 부여받은 은혜의 힘을 줄곧 유지하고 책임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천국에 마음을 고정시킨 신자는 살아 있는 신자이다. 우리를 어리석게 만드는 것은 천국을 향한 우리들의 순례이다. 천국에 중심과 무게를 둔 신자를 바라보라. 그러면 당신은 그가 다른 신자들과 다른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가 이행하는 책임과 대화에서는 그가 항상 추구해 온 천상의 것들이 반영될 것이다.

 

 천국은 당신의 모든 소망이요 지상의 그 어떤 것도 당신에게 안식을 줄 수 없다는 것, 천국을 바라지 않는 마음은 결코 위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은 당신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당신은 위를 걷고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땅에 속하여 있지는 않은 가? 천국 생활의 달콤함을 요구하고는 있는가?

 

 자신의 몸을 침상에 내 뻗치고서 “아, 이 편안함이여!”라고 말하는 게으름뱅이처럼, 당신은 말하고 시시콜콜한 데 신경을 쓰거나 편안한 대로 살면서 “오, 나의 마음을 천국에 두었으면!”하고 말한다.

 

 그러므로 천국 생활 혹은 육신적 생활 양자 중에 선택을 하되 지혜 있는 선택을 하라

-리처드 백스터『성도의 영원한 안식』


[대학은 학문을 추구하는 사회입니다. 학생여러분은 학문을 닦아, 중세의 표현을 빌리자면 식자clerk, 즉 철학자, 과학자, 학자, 평론가, 역사가가 될 사람들입니다.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학문을 하는 것은 일견 이상해 보입니다. 마무리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임무를 시작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아니, 설혹 우리가 죽음이나 군복무로 공부를 중단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해도, 친구들의 목숨과 유럽의 자유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이런 한가로운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불타는 로마를 보며 바이올린을 켜는 꼴 아닙니까?

 우리가 이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으려면 우선 이 질문들을 내려놓고 평화 시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진작 생각해 보았어야 하는 다른 질문들을 먼저 챙겨야 할 듯합니다. 방금 저는 로마가 불타고 있는데 바이올린을 켜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도시가 불타는데 바이올린을 켠 것이 아니라 지옥의 문턱에서 바이올린을 켰다는 점을 네로의 진정한 비극으로 여겨야 합니다. 

 대학에 오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전쟁이 제기한 질문들보다 훨씬 중요한 한 가지 질문을 도저히 외면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질문은 이것입니다.“우리는 매순간 천국이나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피조물이다. 이런 우리가 세상에서 허락된 짧은 시간의 한 조각이라도 문학이나, 예술, 수학이나 생물학 같은 상대적으로 사소한 일들에 사용하는 것이 올바른 일일까? 아니, 그런 일이 심리적으로 어떻게 가능할까?”  

 현재의 재난을 올바른 시각에서 바라보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전쟁이 완전히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내지는 않았습니다. 원래부터 있던 상황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될 따름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벼랑 끝에서 살아왔습니다. 인류 문화는 언제나 그 자신보다 무한히 중요한 것의 그늘에서 존재해야 했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었을 때까지 미뤘다가 지식이나 미를 추구하고자 했더라면 그 추구는 아예 시작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정상적이었던 때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인류는 당장 지식과 미를 원했고 결코 오지 않을 적당한 순간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사람들은 포위된 도시에서도 수학 공리를 내놓고,사형수 감방에서 형이상학적 논증을 펴고, 교수대를 놓고 농담하고, 퀘벡 성채로 진군하면서 새로 지은 시를 토론하고, 테르모필레에서도 머리를 빗었습니다. 이것은 허세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본성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자문해야 합니다.
“어떻게 영혼 구원 외의 다른 일을 생각할 만큼 경박하고 이기적일 수가 있는가?”그리고 바로 지금은 우리의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하나 더 있습니다. “어떻게 전쟁 욍의 다른 것을 생각할 만큼 경박하고 이기적일 수가 있는가?”

 첫 번째 질문은 우리의 삶이 철저하고 분명하게 종교적이 될 수 있고 그래야 마땅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우리의 삶 전체가 철저하게 국가를 위한 것이 될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저는 두 가지 질문 모두에 대해 같은 대답을 할 것입니다. “그런 일이 마땅한 일이건 아니건, 영혼 구원이나 전쟁만 생각하고 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저는 회심한 후에도 제가 회심 이전에 하던 일과 대부분 같은 일을 하며 살 거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정신으로 행하기를 바라지만, 어쨌건 일 자체는 같습니다.

 제가 지난 번 전쟁에 참전하기 전에는 참호에서의 삶이, 어떤 식일지는 몰라도 어쨌든 온통 전쟁뿐일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전선戰線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연합군의 대의명분이나 전투의 진행 상황에 대해 말하거나 생각하는 일이 오히려 줄어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료들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게다가 톨스토이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쟁 소설에서 동일한 사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일리아드Iliad》도 나름의 방식으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회심도 군 복무도 인간적 생활을 말살해 버리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도 군인도 여전히 사람입니다.

 우리 대부분의 경우, 회심을 하건 참전을 하건 그 이전까지 살아왔던 생활이 중단되거나 없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여기서 몇 가지 구별을 해야겠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참전 명분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명분으로서 아주 의로우므로 참전하는 것이 의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모든 의무는 종교적 의무이기도 하므로 그것을 수행해야 할 절대적인 책임이 따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의무가 있습니다. 위험한 해변 근처에 사는 경우라면 누군가 물에 빠졌을 경우 언제라도 구조할 수 있도록 인명 구조법을 배울 의무까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를 구하기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것이 우리의 의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관심을 그 일에만 기울이면서 인명 구조에 몰두한다면, 그래서 다른 일은 전혀 생각하지도, 화제에 올리지도 않고 모든 사람이 수영을 배울 때까지 일체의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편집광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일은 목숨을 버릴 만한 가치가 있지만 인생의 목표로 삼을 만큼 가치 있는 일은 아닌 것입니다.

 종교 역시 다른 모든 자연적 활동을 배제하면서 우리의 삶 전체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위의 경우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의 권리 주장은 무한하고 가차 없습니다.…중간의 길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기독교가 사람들의 일상적인 활동을 어느 것도 배제하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에게 하던 일을 계속 하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디너파티에 가도 된다고 합니다. 심지어 이교도들이 베푸는 디너파티의 참석도 허락합니다. 우리 주님은 결혼식에 참석하시고 기적의 포도주를 제공하셨습니다. 기독교가 가장 활발한 시기에 교회의 후원으로 학문과 예술이 번성했습니다. 물론, 여러분은 이 역설의 해결책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의 모든 자연적인 활동들, 심지어 가장 비천한 활동들이라도 하나님께 바치면 그분이 받아 주십니다. 하지만 제아무리 고상해 보이는 일이라 해도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으면 악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무소부재無所不在와 비슷합니다.

 과연 하나님이 청소부와 구두닦이보다 학자와 시인들을 본질적으로 더 기뻐하실까요? 영어의 ‘영적spiritual’이라는 뜻의 단어를 독일어의 ‘정신적geistlich’이라는 뜻으로 처음 사용해서 더없이 위함하고 반反기독교적인 오류를 끌어들인 사람은 매튜 아널드Mathew Arnold였던 것 같습니다. 이제 이 오류를 머리에서 완전히 지워 버립시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학문을 한다는 말이, 교훈적인 결론 도출을 지적 탐구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베이컨의 말처럼, 그것은 진리의 창조자께 거짓의 불결한 제물을 바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제 말은 지식과 미를 그 자체로 추구하되, 그 욕구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충동과 능력이 존재함을 근거로 그것들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적합한 자리를 차지할 것임을 추론하는 목적론적 논증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에겐 학자의 삶이 의무로 주어져야 할 것입니다. 현재로선 그것이 여러분의 의무인 듯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고상한 문제들이 여러분이 지금 공부하는 앵글로색슨어 음운 법칙, 화학 공식 같은 교과 내용과 우스울 정도로 상관이 없어 보일 수 있다는 점은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모든 소명에는 이와 비슷한 충격이 기다리고 있습니다.젊은 성직자는 성가대 간식을 준비하게 되고, 젊은 소위는 잼 단지들의 관리를 책임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허영심이 강하고 실속 없는 사람들이 걸러지고 겸손하고 강인한 사람들이 남게 되는 겁니다. 그런 종류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동정이 전혀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천국을 세우고 있다고 생각했다면, 현재의 세상을 순례의 장소가 아닌 인간의 영혼을 만족시켜 주는 영원한 도성으로 바꿀 비결을 추구했다면, 이제 우리는 미몽에서 깨어났습니다.]

-C.S. 루이스「전시의 학문Learning in War-Time」『영광의 무게』


난 루이스 쪽에 맘이 가네...우린 천사가 아니라 인간이란 점을 기억해야 정죄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by 하늘지기 | 2008/10/28 15:38 | 기독교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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